놋다리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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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다리밟기


낙동강(洛東江).

700리 물길은 넘실넘실 감돌아, 흐르는 굽이마다에 아롱진 물보라를 뿌리듯이 하도한 사연을 남기면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이 강물은 경상도(慶尙道) 일대에 모든 냇물을 뿌듯이 포용하여 출렁출렁 넓은 벌 한가운데를 누비고 흐른다. 대개, 이 가람에는 여러 지류가 있어, 곳에 따라 명칭이 다르게 불리기도 하지만, 모든 강줄기를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른다.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쏘냐 잊힐쏘냐 아하야.

포석(石) 조명희(趙明熙)는 단편소설 《낙동강》에서 이 강에 얽힌 향토애를 노래하였거니와, 실로 낙동강을 끼고 자라난 사람에게는 낙동강이야말로 정녕 어머니의 젖꼭지와 다름없이 거룩하고도 오롯한 생명의 강물로서 가슴깊이 사무치는 이름인 것이다.

일찍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영남(嶺南) 땅에서 많은 인재가 나오는 까닭을, 여기 함함히 낙동강이 흘러 산수가 좋은 때문이라 했다. 《송천필담(松泉筆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남(南)의 지리는 썩 훌륭해서, 신라 때부터 지금(조선 정조 시대 : 18세기경)까지 수천 년 동안, 경상도에서는 숱한 영상(領相), 장사(將士), 문장가(文章家), 덕행자(德行者)가 나왔으니, 이곳을 일러 인재의 보고라 한다. 속설에 말하기를, 조선의 인재 가운데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善山)에서 나온다고 한다. 선산 땅 산수는 청명영수(淸明潁秀)하여, 예부터 빼어난 선비가 많이 난다." 선산은 “낙동강이 띠를 두른 듯하고, 비봉산은 성을 둘러친 듯하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낙동강은 곧장 남쪽으로 흘러내려, 대구(大邱) 금호강(琴湖江), 합천(陜川) 황강(黃江), 진주(晋州) 남강(南江), 밀양(密陽) 해양강(海陽江)을 아울러서 바다로 향한다.

돛단배는 선산을 지나서 그 상류인 안동(安東)에까지 이를 수 있다. 낙동강 길이는 525.15km인데, 배가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안동까지의 물길은 344km이다.

안동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서 교통의 중심을 이룬 곳으로, 원래 창녕(昌寧國)이란 나라가 있었으나 신라가 고타야군(古陁郡)을 삼았다가 고창군(古昌郡)이라 고쳤고, 고려에서는 안동부(安東府), 영가군(永嘉郡), 길주자사(吉州刺史), 안무사(安撫使), 지길주사(知吉州事),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 하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복주목(福州牧)이 되었다.

안동지방의 놋다리밟기는, 이 고장이 복주목이라 불리던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비롯된 민속으로서, 다정하고 아담한 그 행사는 오늘날의 매스게임처럼 다분히 품위있는 민속놀이인 것이다. 상원(上元)이라면 음력 정월 보름날이다. 이날은 설 다음에 오는 명절로서, 오래 산다는 뜻으로 약반(藥飯), 약과(藥果)를 먹고, 또한 부스럼이 나지 말고 몸 성하기를 바라서 밤, 잣, 호두같은 부럼을 까먹는 날이다.

이날 밤을 원소(元) 혹은 원석(元夕)이라 하여, 머시마(총각)들은 논밭 둑 마른 풀에 불을 놓는 쥐불놀이를 다투어 즐기고, 가시내(처녀)들은 곱게 차린 몸단장에 외씨버선 사뿐히 신고 중계(中溪) 넓은 들로 옹기종기 모여서 정다운 놋다리밟기 놀이를 벌인다.

정월이라 보름이면, 소리 없이 스치는 훈훈한 마파람에 봄기운이 서린다. 눈 녹고 얼음 풀린 낙동강 맑은 물에 대보름 둥근 달이 어렸다. 갑사댕기 치렁치렁, 가시내 얼굴에도 환하게 달빛은 어리고 있었다.

"봉이, 니와 달만 자꼬 치다보고 있노?"

"내사 시방 달 속의 계수나무 찾고 있는기라.”

"구마, 찾아봤노?"

"응, 니도 보그라. 저기 저기 저 달 속의......."

"아참, 봉이, 니 인자 시집갈 신순갑다."

"아나, 그 무슨 소리고? 히야.......” "

"계수나무 본 가시내사 보리 묵기 전에 모두 각씨 안 되드나.""내사 무슨 머시마 있도? 에라...."

“아따, 암만 그래싸도 다 안데. 운쇠 머시마하꼬 니하고 짝이 딱 맞다라."

“옴마! 니 무슨 소리 하노, 백죄......."

“좋문 가마이 있그라.......야, 인자사 다덜 모인갑다. 놋다리하자꾸마."

달이는 봉이의 소담한 댕기꼬리를 잡아끌고 옥이, 찬이, 선이, 낭이, 월이 들이 어울린 속으로 끼어들었다.

"공주님은 뉘고?”

"낭이라 한다.”

"낭이 공주님 건네갈 놋다리일세.”

가시내들은 줄줄이 한 줄로 늘어섰다. 맨 앞 가시내가 허리를 구부리면, 다음 가시내는 앞의 가시내 허리를 두 손으로 붙들어 꼭 끼어안아 가지런히 허리를 구부리고, 그 뒤 가시내도 앞의 사람 허리를 바싹 끼어안고 허리를 구부린다. 그 뒤의 수십 명 가시내들이 한결같이 앞의 사람 허리를 꼭 잡고 허리를 굽히니, 줄줄이 늘어선 모양은 영락없이 냇물 위에 걸쳐놓은 다리 아닌가. 이것은 분명히 사람다리(橋)이다.

이 다리 끄트머리에 낭이 공주님이 오똑 올라섰다. 낭이 공주님 양쪽에는 각기 시녀 한 사람씩 붙어서서 손을 잡아 부축한다. 왼쪽 시녀는 찬이 가시내. 바른쪽 시녀는 월이 가시내. 낭이 공주님은 양쪽 시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놋다리를 밟아나가면서, 옥구슬 구르듯 곱고 청아한 목청으로 노래부른다. 첫 구절을 낭이 공주님이 부르면, 뒤를 받아 뒷 구절은 여러 가시내가 일제히 목청을 모아 노래부른다.

어너 연에 청계상에, 놋다리야 놋다리야.

이 터전은 누 터이고? 나라님의 옥터일세.

이 제애는 누 제애로? 나라님의 옥제앨세.

손이 왔네, 손이 왔네. 정상도에 손이 왔네.

무슨 곳에 쎄애 왔노? 여기 곱게 쎄애 왔네.

멧 대간을 밟고 왔노? 쉰댓 간을 밟고 왔네.

무슨 옷을 입고 왔노? 백마사주 구두바지 곱게 니비 입었드네.

무슨 띠를 띠고 왔도? 관대띠를 띠고 왔데.

무슨 버선 신고 왔도? 타래버선 신고 왔데.

무슨 신을 신고 왔도? 봉황신을 신고 왔데.

그 무엇을 쓰고 왔도? 마라기를 쓰고 왔데.

손이 시려 어이 왔도?  풍시염에 쎄애 왔데.

입이 시러 어이 왔도? 문어 점복 무어 왔데.

무슨 반에 채려 주도? 채죽반에 채려 주데.

무슨 수저 놓였더뇨? 은수저가 놓였더네.

멧 접시를 채렸더뇨? 칠첩으로 놓였더네.

어데다가 밥 담았도? 식기굽에 담어주데.

어데다가 반찬 주도? 접시에 담어주데.

어데다가 짐치 주도? 중발굽에 담어주데.

어데다가 숭녕 주도? 삼청쟁반 쟁반에 뚜에 엎어 갖다주데.

놋다리야, 놋다리야………….

낭이 공주님은 놋다리를 건너갔다 건너오고, 다함없이 왕래하여 노래가 그칠 줄을 모른다. 달이 지새도록 노래는 퍼져흘러서, 낙동강 물결은 하염없이 남실남실 춤추고 있었다.

“붉은 도둑! 도둑 무리가 쳐들어왔다!"

"피에 주린 시뻘건 이리떼 같은 홍두적(紅頭賊)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몰려왔다!"

갑자기 변경에 불길이 올랐다. 난리가 났다. 홍두적의 침입이었다.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恭愍王) 10년(서기 1361년) 10월 20일 정유(丁酉). 홍두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느닷없이 몰려닥쳤다.

홍두적이란, 중국의 원(元)나라에서 일어난 도둑놈들 패거리로서, 그 무리들은 빨간 건(巾)을 쓰고 휘장(徽章)을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紅巾賊), 홍적(紅賊) 또는 홍두적이라고 하였다. 수령한산동(韓山童)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하여 민심을 선동하였으나 관군에 의해 붙잡혀 죽고, 그의 부하 유복통(劉福通)이 군사를 일으켜서 각지를 돌아치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林兒)가 이 무리의 수령이 되어 세력이 날로 커지자, 송(宋)이라는 국호(國號)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하게 되었다. 이 무리는 원나라 군대에 쫓겨 만주(滿洲) 쪽으로 밀려와서는 고려 영토로 자주 침범하여 노략질을 자행했다.

공민왕 8년(서기 1359년) 12월 8일에 홍두적 괴수 모거경(毛居敬)이 4만의 떼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州), 정주(州), 인주(麟州), 철주(鐵州)를 차례로 짓밟고, 이어 서경(西京=平壤)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등이 거느린 군대가 홍두적을 맹렬히 무찔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도둑패는 겨우 300여 명밖에 안 되었다. 그 뒤에도 홍두적은 끊임없이 고려 영토를 어지럽히는 분탕질을 계속하여 왔었다.

이런 홍건적이 이번엔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 사유(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 10여 만이라는 무지무지한 병력을 이끌고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온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안우, 이방실, 김경제(金景磾)로 하여금 적을 맞아 싸우도록 했으나, 원체 많은 적세에 밀려 절령의 방책이 무너지고, 적은 개경(開京=開城)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성계(李成桂)는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일으킨 반란(叛亂)을 토벌하고 나서, 이내 홍두적의 침입을 맞아 싸워서 왕원수(元帥) 이하 100여 명을 잡아죽이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개경이 위태로운 소식을 듣고 후퇴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절령 방책을 무너뜨린 홍두적이 물밀듯이 내리닥치게 되자, 공민왕은 사세가 급박하게 된 것을 알고, 태후(太后)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공민왕 왕후)와 더불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천(利川), 청주(淸州)를 거쳐 임금의 피난 행차는 12월 15일 복주목(福州牧=安東)에 이르게 되었다.

임금의 행차가 다다르던 날, 복주 땅 모든 부녀자들은 마중을 나와서, 먼 길을 추운 날씨에 오느라고 고생한 노국대장공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중계천(中溪川)에 줄줄이 늘어서서 놋다리로 공주님이 밟고 가게 하였다.

이때의 놋다리가 해마다 공주님을 생각하는 행사가 되어, 마침내 안동 지방의 놋다리밟기 민속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놋다리밟기의 놋다리를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동교(銅橋)라 하여 구리로 만든 다리가 놋다리인 듯이 기록했으나 이것은 잘못인 것 같다. 놋다리는 그 내력이나 또는 행하는 상황으로 보아 구리다리 혹은 놋쇠다리가 아니라 다리를 놓(놋)는다는 놋(놓)다리로서, '놓은 다리 밟기'의 뜻인 놋다리밟기인 것이다.

또한 청계산(淸溪山)이라 함은 청계상(淸溪上)이라는 음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서, 청계산동교(淸溪山銅橋)가 아니라, 맑은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놋(놓는다는 청계상(淸溪上) 놋다리밟기라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놀이를 기와밟기라고도 부르는데, 아녀자들이 줄줄이 앞 사람의 허리를 끼어안고 머리와 허리를 수그린 모양이 마치기와지붕의 기와를 깔아 놓은 듯 겹쳐져 있으므로, 그 기와지붕 같은 위를 밟고 간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이 놋다리밟기는 다분히 매스게임의 일종으로서 한국의 전통 스포츠로, 참으로 다정스럽고 인정 넘친 아담하고 품위있는 여성들 특유의 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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